후쿠다에게 정권을 물려주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2. 데탕트 시기의 일본 외교 다나카 미키 정권
(1) 중•일 일•소 관계의 변화
사토는 개인적인 의중으로 후쿠다에게 정권을 넘겨 주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나카가 자민당의 총재로 선출 되었다. 첫 기자회견에서 열도 개
후쿠다 내각(1976): 1977년 후쿠다독트린▷일본이 ASEAN과 공산권 베트남과의 화해를 촉진하는 중개자 역할 자임.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자주노선 단명.
오히라 내각(1978): 자주외교에 종지부. 서방진영의 일원으로서의 입장을 취함
나카소네 내각(1982): 오히라 내각의 노선 계승 강화.
1990
후쿠다독트린’의 시대도 등장하였다. 이것은 일본은 대(對) 동남아시아 정책 후쿠다는 ‘일본은 군사대국이 되지 않으며, 광범위한 분야에서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상호 신뢰 관계를 구축한다’는 입장과 함께 ‘대등한 협력자’의 입장에서 ASEAN 가맹국의 연대 강화를 위한 자주적 노력에 적극 협력
후쿠다독트린, 즉 ‘동남아시아 외교 3원칙’이었다. 1974년 동남아시아 순방 중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일어난 타나카(田中角栄) 수상에 대한 격렬한 반일데모에서 충격을 받아 평화와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호혜 평등적 관계를 강조하는 내용이다. 전반적으로 일본이 아시아에 보다 중
후쿠다독트린
- 비군사대국화
- 동남아와 상호신뢰
③ 중일평화우호조약(1978)
④ 클린자민당 주장
- 당원 참가 예비선거 도입
- 파벌해소
9. 大平正芳(おおひらまさよし) : 1978~1980
① 재직일수 : 554日
② 파벌간 항쟁 심화
③ 자민당 분열
④ 중(의원)참(의원) 동시선거 중 급사
10. 中根康弘(なかそねやす
저항력으로 국제관계의 불확실성 줄이기
같은 흐름으로: 방위비의 한계 설정
77년 가을 덩샤오핑이 후쿠다 총리에게 조약체결을 재촉
장애 : 자민당 내에서는 친타이완파를 중심으로 조약에 대한 신중론이 강했음. 그러나 78년 5월 조약교섭 결정.
중·일 교섭의 초점: 반패권조항
선병효과: ODA를 통한 FDI의 유인 효과
-전기, 수도와 같은 필요에 대한
더 나은 접근
-더 나은 교통으로 시장으로의
접근 증가
인프라개발
(주로 ODA)
수입
증가
소비,
시장 규모
확대
학교, 병원, 교육과 보건서비스로의 접근을 위한 도로
민간 자본
축적
후쿠타
독트린
ASEAN
Ⅰ. 유신체제의 성립 배경
유신체제가 들어서기까지
유신 체제를 선포하기 까지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향한 강한 권력욕과 더불어 그 명분이 되어준 국내외적 상황들이 존재했다. 닉슨독트린에서 “아시아 문제의 아시아화”와 7.4 남북 공동 선언과 같은 국제 정치적 환경들 속에서 유신체
독트린이라 불리는 정부의 외교정책은 미국과의 동맹관계 강화, 북한의 비핵화를 통한 개방, 아시아 지역 외교 확대가 그 핵심이었다. 새 외교정책은 전반적으로 지난 10년간 나타났던 변화를 원점에서 재검토해 한국의 외교노선을 전통적인 기반으로 되돌리려 했다. 지난 10년, 소위 말하는 좌파정권과
독트린이라 불리는 정부의 외교정책은 미국과의 동맹관계 강화, 북한의 비핵화를 통한 개방, 아시아 지역 외교 확대가 그 핵심이었다. 새 외교정책은 전반적으로 지난 10년간 나타났던 변화를 원점에서 재검토해 한국의 외교노선을 전통적인 기반으로 되돌리려 했다. 지난 10년, 소위 말하는 좌파정권과